소개
약칭은 BVSC이다. 원래는 쿠바음악의 전성기로 불리는 1930~1940년대 쿠바의 수도 아바나 동부에 있던 고급 사교클럽을 일컬었다. 당시 아바나에는 카바레·클럽 같은 사교장이 번성하였는데, 쿠바음악의 황금기를 일군 대표적인 음악가들이 모두 이 클럽에서 음악을 연주하였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환영받는 사교클럽'을 뜻한다
그러나 쿠바혁명으로 카스트로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이념을 담은 포크송이 주류를 이룸에 따라 쿠바의 전통음악은 뒤로 밀려났다. 이로 인해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을 비롯해 번성하던 아바나도 쇠퇴하고, 이곳에서 연주하던 음악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30여 년 간 쿠바 음악은 침체기에 빠져 있었다
1995년 미국의 기타리스트이자 레코딩 프로듀서인 R.쿠더와 영국의 음반사 월드 서킷 사장 N.골드가 쿠바 음악가들의 합주를 녹음하기 위해 쿠바를 찾았다. 이듬해 다시 쿠바를 찾은 쿠더는 흩어져 있던 노인 연주자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허름한 스튜디오에서 6일 만에 라이브로 녹음을 끝냈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쿠더가 번성했던 옛 클럽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이때 붙인 명칭이다. 아프로 쿠반 재즈클럽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당시 녹음한 앨범은 '월드 서킷·논서치'라는 레이블로 출시되었는데, 출시와 동시에 세계적인 쿠바음악 붐을 일으키며 6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멤버는 기타리스트 C.세군도·E.오초아, 볼레로 가수 I.페레르, 피아니스트 R. 곤살레스, 유일한 여성 멤버인 볼레로 가수 O.포르투온도 등 5명이다. 1946년생인 오초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70대 이상의 노인으로 구성되었다. 1997년 그래미상 베스트 트로피컬 라틴 퍼포먼스 부문을 받았으며, 1999년에는 독일 영화감독 W.벤더스에 의해 클럽 이름과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져 이듬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음반으로는 《아바나 델 에스테 Habana del Este》, 《피오 멘티로소 Pio Mentiroso》, 《마리아 카라콜레스 Maria Caracolas》, 《엘루베 창고 Elube Chango》 등이 있다.
멤버

꼼빠이 세군도(Compay Segundo/1907.11.18~2003.7.13) - 기타리스트&보컬
꼼빠이 세군도는 쿠바 음악사의 중추인물이자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는 여전히 열정과 재치 그리고 에너지가 넘치는 음악을 만들고 있다.
꼼빠이는 시보니 섬 동쪽의 산악지역에서 태어나 쏜(son)의 발생지인 산티아고에서 자랐다. 본명은 프란치스코 레필라도(Francisco Repilado). 그는 1920년대에 이미 훌륭한 기타리스트이자 트레스(tres) 연주자로 성장해 있었다. 낮에는 담배농장의 일꾼으로 아니면 이발사로 일하고 밤에는 근처 바에서 신도 가라이(Sindo Garay)나 니코 사키토(Nico Saquito )와 같은 연주자들과 함께 공연했다. 15세에 그는 그의 첫 자작곡 <요 벵고 아키(Yo Vengo Aqui)>를 썼고 이후 그의 작품은 수백 곡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클라리넷을 공부하여 20세에 그의 스승 엔리케 부에노(Enrique Bueno)가 이끄는 산티아고 시립악단(Municipal Band of Santiago)의 클라리넷 주자가 되기도 하였다.
꼼빠이가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재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세번째 D현을 두 줄로 만듦으로써 기타와 쿠바 트레스(Cuban tres)의 특징을 절묘하게 혼합한 7현 악기 아르모니코(armonico)를 발명하기도 했다. 트릴리나(trilina)라고도 알려져 있는 이 악기를 그는 오늘날에도 연주하고 있다. "나는 더 많은 하모니를 찾고 싶었습니다. 트레스로는 부족했어요."라고 그는 설명한다.
꼼빠이는 1929년에 처음 하바나를 방문했는데 1934년에 니코 사키토의 '퀸테토 쿠반 스타(Quinteto Cuban Stars)'와 연주를 한 뒤로 이곳으로 이주했다. 사키토의 밴드는 공연 후에 하바나를 떠났으나 콤 파이는 남아 하바나 시립악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938년, 그는 '후스타 가르시아스 콰르테토 아투에이(Justa Garcia's Cuarteto Hatuey)'의 일원이 되어 멕시코에 다녀오기도 했다.
다음해에 하바나로 돌아온 그는 '콘훈토 마타마로스(Conjunto Matamaros)'에 입단하여 12년간 클라리넷 주자로 활동했다. 때를 같이 하여 그의 연주경력에 가장 빛나는 성공으로 기록될 모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거의 우연에 가깝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1942년의 어느날, 꼼빠이는 로렌조 이에레수엘로(Lorenzo Hierrezuelo)의 머리를 이발해주던 중 뜻이 맞아 듀오를 결성하고 스스로를 '동지들'이라는 뜻의 '로스 콤파드레스(Los Compadres)'라 이름하였다. 꼼빠이에게 있어 이에레수엘로와 활동한 13년간은 "생애 최고의 시기"였다. 그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말로 하지 못하는 매우 단순한 것들을 음악에 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음악 속의 시와 자연을 감상했지요. 우리가 만든 것은 결코 의미 없는 소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즈음에 그는 꼼빠이 세군도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꼼빠이'는 동지라는 뜻의 '꼼빠드레'의 줄임말이고 '세군도'는 베이스 화음을 잘 소화해내는 그의 낮은 목소리(bass harmony second voice의 'second'를 따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1956년에 꼼빠이 세군도는 그의 이름을 딴 '꼼빠이 세군도와 친구들(Compay Segundo y sus Muchachos)'을 결성한다. 트리오로 출발한 이들은 후에 4인조 그룹이 되었다. 수없이 멤버들을 교체하면서 꼼빠이는 이 그룹의 명맥을 오늘날까지 유지해왔다. 그의 아들 살바도르(Salvador)는 이 그룹의 더블베이스를 맡고 있다. 꼼빠이는 1996년 이스트 웨스트 음반사(East West Records)와 계약을 맺고 <요 벵고 아키>를 녹음했고, 안톨로지아(Antologia)라는 제목의 더블 CD 앨범을 내기도 했다.
쿠바혁명으로 카스트로(Fidel Castro) 정권이 들어서면서 공산주의 이념을 담은 포크 음악이 주류를 이룸에 따라 쿠바의 전통음악이 뒤로 밀려난 뒤, 세군도는 20여 년 간 담배공장에서 노동자로 지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부터 다시 예전의 동료 음악가들인 피아니스트 루벤 곤잘레스(Ruben Gonzales), 보컬 이브라임 페레(Ibrahim Ferrer) 등과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활동을 재개해 1996년 음반 《더 베스트 인 라이프 The Best in Life》를 발표하였다
이듬해에는 클럽 이름과 같은 제목의 음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발표해 세계 언론과 음악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300만 장에 가까운 음반이 판매되었고, 같은 해 그래미상을 받았다. 특히 이 음반에 실린 노래 《찬찬 Chan-Chan》은 지금까지도 세계 각지에서 공연되고 있다.
라이 쿠더(Ry Cooder)는 꼼빠이 세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내린 신의 계시이자 영감의 근원이며 음악의 발원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훌륭한 음악가가 없었다."

엘리아데스 오초아(Eliades Ochoa/1946.6.22~현재) - 기타&보컬

이브라힘 페레르(Ibrahim Ferrer/1927.2.20~2005.8.6) - 보컬
1927년 산티아고 데쿠바의 한 댄스 사교클럽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4살 때인 1941년 생계를 위해 산티아고의 지방 보컬그룹에 몸담아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노래를 불렀다. 이어 밴드를 결성해 생일 파티나 결혼식에 불려 다니며 노래하던 중 1950년 P.알론소가 이끄는 밴드의 전속가수가 되면서 전업 음악가가 되었다.
년부터 가수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산티아고 현지 밴드들과 노래를 했다.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파초 알론 소(Patio Alonso)'의 밴드에서 보컬로 활약했고, 그때부터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쿠바 음악의 전설로 남을 '오르케스타 데 차핀(Orquesta de Chapin)'과 베니 모레(Benny More)와 함께 공연을 하기도 했다. 알론소의 밴드는 마침내 1959년에 하바나로 이주했고 이브라임은 20년이 넘도록 그들과 함께 활동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알론소의 밴드는 '로스 보쿠코스(Los Bocucos)'로 알려져 있었고 커피열매를 빻는 소리에서 비롯되었다는 필론 리듬을 발명해 유행시키기도 했다.
이때부터 쿠바의 유명한 보컬그룹의 객원가수로 활동하였고, 1959년에는 알론소의 밴드와 함께 아바나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1961년 쿠바혁명 후 아메리칸 재즈나 볼레로 등이 부르주아지의 음악으로 낙인 찍히면서 연주활동을 중단하였다.
그의 거실에는 나자로 성자(Saint Lazarus) 또는 바발루아예(Babalu-aye)를 위한 제단이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바발루아예는 아프리카 출신의 카톨릭 성자 중 하나로 쿠바의 산테리아(Santeria)교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다. 신앙심이 돈독한 이브라임은 매일같이 그의 제단을 초와 장식용 전구 그리고 생화로 꾸민다. 월드써킷 세션에 시골 사람과 같은 이미지의 소네로가 필요하게 되자 이브라임은 매일같이 산책을 하던 길 한복판에서 납치되다시피(?) 하여 기용되었다.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아바나 구시가지의 낡은 아파트에서 적은 연금과 구두닦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1996년 미국인 레코딩 프로듀서 R.쿠더가 1930~1940년대 쿠바 음악가들의 산실이었던 사교클럽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과 같은 이름의 보컬그룹을 결성하였다. 이 클럽은 쿠더가 1950년대 전후에 활동하던 고령의 음악가들을 찾아내 구성한 그룹으로, 페레르는 1997년 어느 날 아바나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제작자의 눈에 띄어 이들과 합류하였다.
페레르는 이 클럽에서 볼레로 가수로 활동하면서 앨범 《도스 가르데니아스 Dos Gardenias》로 단번에 스타가 되었다. 1999년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과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된 뒤에는 다른 멤버들과 함께 쿠바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2000년에는 라틴 그래미상 최우수 신인 예술가상을 받았다. 2005년 8월 6일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루벤 곤살레스(Ruben Gonzalez/1919.5.26~2003.12.8) - 피아노
루벤 곤살레스는 쿠바 음악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클래식 피아니스트나 의사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인물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반세기가 넘도록 쿠바 음악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남아 새로운 경향과 스타일을 창조해왔다. 루벤은 1919년 4월 비야클라라주(州) 산타클라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5살에 시엔푸에고 컨서버토리를 졸업하였다.
루벤은 1934년에 시엔푸에고 음악학교(Cienfuego Conservatoire)를 졸업한 뒤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낮에는 의사로 밤에는 연주가로 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그의 피 속에 흐르는 쿠바 음악의 리듬 특히 쏜(son)에 대한 열망을 주체하지 못했다. 결국 1941년에 의학공부를 포기한 루벤은 하바나로 이주하여 전업 연주가로 변신한다. 여기서 쿠바의 음악가 A.로드리게스의 눈에 띄어 1946년까지 그가 이끄는 '오케스트라 데 로스 헤르마노스'에서 연주하였다. 곤살레스가 자신만의 독특한 피아노 연주 스타일을 완성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로부터 1년이 채 되지 않아 위대한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Arsenio Rodriguez)'에 합류하는가 하면 '로스 에르마노스 오케스트라(Orquesta de Los Hermanos)'에서 몽고 산타마리아(Mongo Santamaria)와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40년대의 쿠바에는 진정한 음악인으로서의 삶이 있었습니다. 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연주를 했지요."라고 루벤은 과거를 회상한다.
타계한 루이스 '릴리' 마르티네스(Luis 'Lili' Martinez)와 페루친(Peruchin)은 맘보를 발전시키고 모던 재즈의 선율을 흡수함으로써 쿠바 음악의 변천을 주도했었다. 그러기에 루벤은 말한다. "지금 우리가 듣는 쿠바 음악의 모든 것은 사실 과거의 그 찬란했던 시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편, 루벤은 그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했다. "아르세니오는 내게 말하곤 했었죠. '다른 사람들이 뭘 하고 있는지는 신경쓰지 말아.'라구요. 다른 연주자들의 음악과는 다른 나만의 음악을 연주해서 '아, 루벤의 음악이야.'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라고 충고했었죠."
파나마와 탱고 연주자들과 함께 공연했던 아르헨티나에서의 시간을 뒤로 하고 루벤은 하바나로 돌아왔다. 그리고 트로피카나를 비롯한 여러 클럽에서 캬바레 밴드들과 함께 연주했다. 1960년대 초반이 되었을 때 루벤은 차차차를 발명한 엔리케 호린(Enrique Jorrin )과 한 팀이 되어 그로부터 25년 동안을 함께 활동했는데 1980년대 중반에 호린이 죽자 잠시 루벤이 밴드의 리더 역할을 맡았다. 가중된 책임을 달가워하지 않은 루벤은 곧 은퇴하였고, '아프리카-쿠바 올 스타즈(Afro-Cuban All-Stars)'와 라이 쿠더의 강렬한 유혹이 있기까지 무대에 서지 않았다.
"집에 있던 피아노를 없앤 터라 에그렘 스튜디오의 피아노를 보자마자 곧장 피아노로 달려갔지요. 그 피아노도 날 알아보는 것 같았어요."라고 루벤은 말한다. 77세의 고령이 되어서야 루벤은 솔로 앨범을 내자는 제의를 받았다. 진작에 했어야 할 일을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와 처음 레코딩 스튜디오에 발을 들여놓은 지 43년 만에 겨우 착수하게 된 것이다. 1996년 미국의 레코딩 프로듀서 R.쿠더가 1930~1940년대 쿠바 음악가들의 산실이었던 사교클럽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과 같은 이름의 재즈 보컬을 결성하자, 여기에 합류하였다. 이때부터 곤살레스는 클럽의 나머지 4명의 멤버와 함께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아프로 쿠반 스타일 피아노 연주의 개척자, 위대한 피아니스트라는 별칭을 얻었다.
특히 1997년 발표한 솔로앨범 《인트로듀싱 루벤 곤살레스 Introducing Ruben Gonzalez》가 유명하다. 2001년 클럽 멤버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해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라이 쿠더는 루벤을 간단명료하게 평했다. "내 평생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라고.

오마라 포르투온도(Omara Portuondo/1930.10~현재) - 보컬
쿠바의 볼레로 가수로서 쿠바의 세계적인 재즈 보컬그룹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에서 유일한 여성멤버로 활동하였다. 천부적인 목소리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풍부한 음역으로 쿠바의 디바로 불리며 아직까지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30년 10월 아바나에서 쿠바의 국가대표 야구선수인 흑인 아버지와 부유한 에스파냐계(系)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0대 중반에 언니와 함께 유명한 카바레 트로피카나에서 댄서로 데뷔한 뒤, 주말에는 아메리칸 재즈 스탠더드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때부터 아메리칸 재즈의 영향을 받은 쿠바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인 '필링(feeling)의 피앙세 미스 오마라 브라운'으로 불리며 쿠바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이어 하이디·E.부르케·M.세카다와 함께 피아니스트 A.디에스트로가 이끄는 여성 보컬 '콰르테토 라스 다이다'에 몸담아 15년 동안 활약하였다. 1959년에는 첫 솔로 음반 《마히아 네그라 Magia Negra》를 발표한 뒤, 동료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애미에서 활동하였다.
1960년대 초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쿠바와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자 쿠바로 돌아와 공연과 음반 작업을 하였다. 쿠바혁명 후 20여 년 간 쿠바 전통음악이 뒤로 밀려나고 포크송이 주류를 이룰 때도 포르투온도는 계속 쿠바 국민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1990년대 중반부터 다시 쿠바풍의 재즈가 빛을 보기 시작하고, 마침 미국 레코딩 프로듀서 R.쿠더가 쿠바를 방문해 1996년 쿠바 음악가들의 산실인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을 재개하자 이에 합류하였다. 포르투온도는 5명으로 이루어진 이 보컬의 유일한 여성 멤버로, C.세군도와 함께 볼레로 곡인 《베인테 아노스 Veinte Anos》를 불러 이듬해 그래미상을 받았다.
천부적인 목소리와 발라드·볼레로·재즈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풍부한 음역으로 아직까지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쿠바의 국보급 보컬리스트, 쿠바 최고의 볼레로 가수, 쿠바의 에디트 피아프, 쿠바의 디바(최고의 여성 가수) 등 여러 별칭으로 불린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은 1999년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음반으로 솔로음반 《마히아 네그라 Magia Negra》(1959), 공동음반 《베인테 아노스 Veinte Anos》(1996)가 있다.

피오 레이바(Pio Leyva/1917.5.5~2006.3.22) - 작곡가&보컬
레이바는 '쿠바의 엘 몬투네로(El Montunero de Cuba')로 알려질 만큼 유명한 작곡가로 그의 곡 중에는 쿠바 음악의 스탠다드로 꼽히는 작품이 여럿 있다. 6세에 봉고 연주대회에서 입상하였으며 1932년에 가수로서 데뷔하였다. 깊고 토속적인 목소리를 가진 피오는 1950년에 RCA Victor사와 첫 계약을 맺은 후로 25개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즉흥연주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피오와 함께 공연한 밴드로는 위대한 베니 모레(Benny More), 베보 발데스(Bebo Valdez)와 노로 모랄레스(Noro Morales)가 있으며, 한때 '콤파이 세군도와 친구들'의 멤버로 활약하기도 했다.
대통령 궁에 쿠바 혁명군의 공격이 개시된 1953년의 어느 날, 피오는 '콤파이 세군도와 친구들'과 녹음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앨범에서 바깥의 총성을 들을 수 있다고 피오는 맹세코 주장한다. 1991년에 피오는 서 아프리카에서 순회공연을 가지며 74년의 청춘을 자랑했다. 서 아프리카에는 피오를 신봉하는 열광적인 팬들이 있다.

마누엘 리키아 '푼틸리타'(Manuel Licea 'Puntillita'/1927~현재) - 보컬
푼틸리타'는 일곱 살에 노래를 시작해서 1941년에 '오케스트라 리세오(Orchestra Liceo)'에 입단했다. 1950년대에는 아돌포 구스만(Adolfo Guzman), 로베르토 파스(Roberto Faz), 카스카리토(Cascarito) 등을 포함한 하바나의 명성있는 밴드의 리드 보컬로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는 또한 셀리아 크루즈(Celia Cruz)와 함께 노래한 적이 있으며 그 후 거의 70년간을 활동해온 전설적인 그룹 '소노라 마탄세라(Sonora Matancera)'와 노래하기도 했다. '푼틸리타'는 '소노라 마탄세라'와 히트곡인 <수탉과 암탉 그리고 말(The Rooster, The Hen and The Horse)>을 취입했다. 그의 세련된 보컬 스타일은 쿠바 음악의 다양한 리듬을 자유자재로 소화해왔는데 그 중에서도 쏜(son)과 볼레로가 그의 주특기이다.

올랜도 로페스 베르가라 '카차이토'(Orlando Ropez Vergara 'Cachaito'/1933~현재) - 단손
로페스 가는 훌륭한 베이스 주자들을 배출한 가문으로 쿠바에는 널리 알려져 있다. 카차이토의 아버지 오레스테스(Orestes)와 숙부 이스라엘은 그들의 아버지이자 카차이토의 조부인 페드로(Pedro)로부터 베이스를 배워 훌륭한 연주자가 되었다. 1930년대에 오레스테스와 이스라엘 로페스는 베이스 연주의 교과서를 다시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활동을 했다. 오레스테스는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와 함께 맘보 리듬을 개발하는데 기여했고, '카차오'로 알려진 이스라엘은 데스카르가(descarga) 스타일을 발전시키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어린 시절의 카차이토는 바이올린 연주도 심심찮게 했으나 결국엔 베이스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카차이토가 가장 처음으로 끌린 악기는 단손(danzon)이었는데 이미 12세에 당시 댄스음악을 하는 밴드로서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오르케스타 리버사이드'와 연주했을 정도로 실력이 대단했다. 한번은 숙부의 권유로 1930년대부터 활동해오던 '아르카나 이 수스 마라빌야스 (Arcana y sus Maravillas)'와 연주했다가 이 나이 어린 음악가의 선율에 매료된 밴드로부터 아예 멤버로 들어올 것을 제안받기도 했다.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한 음악적 재능을 발휘했던 카차이토는 1960년대에 이르러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Orquesta Sinfonica Nacional)'와 함께 클래식 음악의 연주를 시작했다. 초저녁에는 콘서트 홀에서 베토벤을 연주하고 밤이 깊어지면 클럽에서 전자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선호한 악기는 어쿠스틱 베이스였으며 찰리 밍구스(Charlie Mingus)의 영향으로 재즈음악을 매우 사랑했다. 뿐만 아니라 그 즈음의 카차이토는 이라케레(Irakere)와 함께 연주하면서 모던 라틴 재즈를 발전시키는데 일조했다. 지금도 그는 쿠바 음악, 클래식, 재즈의 세 음악 장르를 같은 열정을 가지고 연주하고 있다.

마누엘 미라발 '과지로'(Manuel Mirabal 'Guajiro'/1933~현재) - 트렘펫
아버지의 무릎에서 트럼펫을 배운 미라발은 1951년이 되어서야 전문연주자의 길에 입문했다. 그는 1953년 '스윙 카시노(Swing Casino)'라는 재즈 밴드에 들어간 지 3년 뒤에 '룸바바나 그룹(Conjunto Rumbavana)'을 결성했고, 다시 1960년에는 '리버사이드 오르케스타(Orquesta Riverside)'에 입단했다. '구아히로' 미라발이라는 별명은 '리버사이드 오르꾸에스따'의 보컬이었던 티토 고메스(Tito Gomez)가 준 것이다. 그 후에도 미라발은 여러 그룹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아르만도 라메르(Armando Ramer)가 지휘하는 '오르케스타 델 카바레 트로피카나(Orquesta del Cabaret Tropicana)', 레오나르도 티모르(Leonardo Timor)가 지휘했고 하바나의 국립호텔에서 공연했던 '오르케스타 카시노 파리시엔(Orquesta Casino Parisien)', 그리고 쿠바 국립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국의 공식 오케스트라인 '오르케스타 델 ICRT(Orquesta del ICRT)'가 모두 미라발이 몸담았던 그룹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스카르 데 레온(Oscar de Leon)과 호세 펠리치아노(Jose Feliciano)와 순회공연을 갖기도 했다.

바르바리토 알베르토 토레스 델가도(Barbaro Alberto Torres Delgado/1956~현재) - 라우디
바르바리토는 쿠바 최고의 라우드(laud 또는 라우디스타) 주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개의 현으로 소리를 내는 라우드는 작고 류트(lute)와 유사한 악기이다. 바르바리토(Barbarito) 14세부터 다양한 밴드와 전문 라우드 주자로서 연주했는데 이중에는 '캄포 알레그레(Campo Alegre)'와의 공연에서는 위대한 셀리나 곤살레스(Celina Gonzalez)의 곁에 서는 영광을 안았다. 실제로 바르바리토는 쿠바 음악의 대가의 반열에 드는 사람들과는 거의 모두와 함께 연주한 경험이 있다. 작곡가 겸 기타리스트인 레오 브라워(Leo Brouwer), 피아니스트 파포 루카(Papo Lucca), 베네수엘라 출신의 살사 가수 오스카 드 레온(Oscar d'Leon) 등 그와 연주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한편, 바르바리토는 음악 강사로서도 활약하고 있다.

아마디또 발데스(Amadito Valdes/1946~현재) - 드러머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에서 띰발을 연주하였다. 2004년 그래미에 노미네이트되어 2004 2월 5일 수상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영화에도 출연하였고 현재 왕성한 활동과 함께 음반 작업과 자서전을 준비 중이다. 음악은 그의 가족으로 유전되어 그의 딸이자 가수로 활동하는 이다니아 발데스(Idania Valdes, 21세)와 함께 한 부대에 서기도 한다.
2006.8.14 기사
“누구나 세상에 나오면 떠날 때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 그분의 건강이 안 좋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사람이 세상을 떠날 시기는 하나님밖에 모르는 것이죠.”
1990년대 후반 전 세계에 쿠바 음악 돌풍을 불러온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멤버 중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아마디토 발데스(60·드러머)씨와의 인터뷰는 최근 권력을 이양한 피델 카스트로(80) 국가평의회 의장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최근 수도 아바나의 자택에서 만난 발데스씨는 “얼마 전 의사가 내 건강 진단을 하더니 ‘당신은 20대 같은 몸을 가졌다’고 했다”면서 “나는 원래 낙관적인 사람이어서 모든 게 잘될 거라 생각한다”고 웃어 보였다.
1996년, 제삼세계 음악의 대부로 불리는 프로듀서 라이 쿠더가 쿠바의 노장 뮤지션 15명을 불러 모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앨범은 1997년 그래미상을 수상하고 전 세계를 쿠바 음악 열풍에 빠뜨렸다. 발데스씨는 “모든 위대한 문화는 이질적인 문화가 합쳐질 때 탄생하는 법”이라며 쿠바 음악의 힘은 ‘아프리카와 유럽 문화의 만남이 빚어낸 혼혈성’에서 나온다고 했다.
발데스씨는 지난 5월에도 스위스 베른에서 공연하는 등 국내외를 오가며 연주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드럼 스틱 등 악기가 미국·독일에서 나오고 일본의 재즈음악 잡지가 사진 모델로 초빙할 정도로 국제적 명성도 누리고 있다. 그런 그에게 “혹시 미국에 가서 활동하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고 묻자 모국에 대한 애정이 담긴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미국에 있으면 쿠바에 있는 것보다 음악적으로 유명해지기는 훨씬 쉽겠지요. 그렇지만 쿠바처럼 작은 나라에 있으면서 세계에 음악을 널리 알린 것이 내게 더 큰 긍지를 갖게 합니다.”
특히 그는 한국에 각별한 관심이 있다. 그는 “명함에 인쇄된 내 얼굴 사진도 한국 사진 작가가 찍어준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내년쯤 한국을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가게 되면 한국 자동차를 꼭 한 대 사고 싶다”고 했다. 그는 현재 스페인어와 함께 영문으로 된 홈페이지(www.amaditovaldes.com)도 운영 중이다.

후안 디 마르코스 곤살레스(Juan de Marcos Gonzalez/1954~현재)

발굴자 프로듀서 - 라이 쿠더(Ry Cooder/1947.3.15~현재)
라이 쿠더 아들 - 요하임 쿠더(Joachim Cooder)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제작사 사장- 니키 골드(Nick Gold)